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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청년 함석헌

우리나라 TV와 품위

by anarchopists 2020. 2. 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8/11/17 13:17 Hwangbo]에 발행한 글입니다.


우리나라 TV와 품

문병호(변호사, 전 국회의원)


우리나라 TV방송에는 품위가 없다. TV방송은 마치 한 학급의 담임선생님과 같아서 선생님의 언행이 학생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듯이 시청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 TV방송은 점점 무례하고 거칠어지고 살벌해지기까지 한다. 걱정스런 일이다.

최근 안재환이라는 한 연기자가 죽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늦더위에 지쳐가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좋은 학벌에, 최근 결혼한, 순하게 생긴 이 연기자의 비참한 최후는 TV방송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연일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그의 행적과 사생활이 특종으로 보도 되었고, 사건 발생 3주에 이르는 아직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시시비비가 화면에 비춰지곤 한다.

필자는 이번 보도에서 특히 그의 장례식과 조문인터뷰를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수많은 카메라가 장례식장에서 연예인들과의 인터뷰를 기다렸고, 조문 차 온 연예인들의 모습을 흥미 거리로 제공했다. 카메라는 장례식의 숙연함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오로지 사람들의 공허한 호기심을 채우지 못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TV방송은 무례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장진영이라는 여배우는 며칠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퇴원하고 잠적했다. 취재진이 너무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도저히 그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젊은 여배우의 불행이 언론에게는 시청률을 올리고 판매부수를 늘리는 절호의 기회였던 모양이다.

장례식장이나 입원실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위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도 때로는 힘들고, 아프고, 죽는다. 그들에게도 사생활과 가족이 있고, 지키고 싶은 비밀이 있다. 카메라는 한번 그들을 훑고 지나가지만, 또 대중은 그저 입방아 몇 번 찢다 말겠지만, 당사자들의 인격이나 체면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다.

주말 저녁 우리나라 TV방송을 보라!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고, 청장년층 연배의 소위 스타들은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유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성을 직접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외설적인 노래와 춤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정상적인 국어를 사용하는 훈련받은 방송인보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질 미달의 연예인들이 억지와 몰상식을 뽐내며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물론 TV방송은 우리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재미’가 싫으면 TV를 끄고,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 된다. 가뜩이나 위험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TV만큼 싸고 안전한 오락수단이 있는가 되물을 수도 있다. 점차 원자화되어가는 사회에서 나 대신에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행복해하는 TV속 인물들을 보면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른 대안이 없지 않는 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도의 문제다. 백번 양보하여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막말하고, 외설적 표현을 하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적당히 할 수 있다. 최소한의 예의를 무시하는 TV방송은 결국 시청자들에게 ‘재미’가 아닌 ‘독’을 뿌려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TV방송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TV방송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지와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따라서 언론인 윤리강령을 강화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구체적인 불이익을 줄 필요가 있다. ‘재미’를 추구하되, ‘재미’의 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방송인을 육성하고 응원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공중파 방송은 잡탕 방송이다. 우리의 공중파 방송은 공익적인 프로에서부터 선정적이고 오락적인 프로까지 너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공중파 방송은 시청자가 선택하여 시청하는 것이라기보다 무조건적으로 시청하도록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공중파 방송의 품격과 수준은 어느 정도 관리되어져야 한다. 언론의 자유가 가장 보장된 미국도 공중파 방송에서는 선정성, 폭력성, 오락성이 강한 프로를 방영하지 않도록 관리되고 있고 그러한 프로들은 시청자가 따로 비용을 내는 사설 채널에서 주로 방영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처럼 외설이나 과장된 억지로부터 자유로운, 품위 있는 공영방송 하나쯤은 키워야 할 때이다. 우리 문화의 미래와 청소년의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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