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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장영근 선생 칼럼

미운 내 얼굴

by anarchopists 2019. 1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7/23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미운 내 얼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얼굴을 쳐다보면서 남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러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버린다. 상대가 말을 할 때에도 말 하는 자의 표정을 알뜰히 분석해 보면서 그 말에 대한 적절한 자기의 대응 할 수 있는 말을 구상하게 된다.

앞사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로 채듯이 열변을 토하게 된다. 그 말속에 보편적이요 객관적이요 타당한 말로서 전체가 유익되는 말 일 때에는 더 할 수 없는 다행이지만 대부분 자기가 경험했거나 배웠던 일들을 총동원해서 상대보다 우월성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런 현상들을 두고 요즘 세상을 자기 P.R 시대에 살고 있다고들 한다.

P.R이란 도대체 뭣이냐고 누가 물었을 때 “나쁜 것은 P(피)하고 좋은 것은 R(알)리는 것이다”라는 말에 웃음보가 터지기는 해도 정답 중에 명답이니 명념(銘念)해 둘 내용이다. 요즘 와서는 이것조차 만족하지 못해 P.R도 모자라 자기연출을 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P.R은 듣거나 말거나 혼자 지껄이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연출은 자기 주연 외에 조연과 액스트라까지 동원되며 공연장까지 마련하는 등 자본투자까지 동원되는 상황이기도하다.


이는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러다 보면 이것이 분수를 넘으면 배가 아픈 대상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 분쟁이요 경쟁(競爭)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경쟁이라는 쟁(爭)은 전쟁(戰爭)이라는 쟁자이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내가 살기위해 너를 죽이는 행동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패턴을 생존경쟁이라고 들 말한다.

사회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위계질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게 이성과 지성과 그리고 영성이 있기에 분별하여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나왔으니 이들의 부르짖음이 한결 같이 높은 곳에서의 뜻을 찾자는 것이다. 이 높은 곳이라 함은 위치가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그 경지에 뜻을 찾자는 것이다.

여기에 성인 현자들이 나타나게 되고 역사의 스승이 된 것이다. 이 분들의 가르침은 시대와 지역만 다를 뿐이지 높은 뜻은 한결같다. 이런 뜻을 찾아 같이 더불어 살아가자면 바로 나 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이 된다. 나라는 존재는 이 우주의 주인이며 곧 왕 같은 존재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거나 지배 받을 의무 없이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귀한 존재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구한 역사 속에 아무 보장도 없는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티끌 같은 존재이다. 여기에 이 둘을 묶어주는 하나의 끈이 있으니 이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 됨이란 철학이다. 돌이켜서 생각 해 보면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나의 생존에 절대 필요한 것들로 이뤄져 있다. 다만 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니 고마워 할 줄 모르고 살아왔을 따름이다.

하물며 우리 인간끼리의 관계야 말로 공생공영의 절대적인 존재들이다.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은 필요존재라는 것이다. 남이 있어야 나의 존재 가치가 있으니 곧 하나 됨이다. 내가 지금 쳐다보고 있는 상대가 곧 나라는 철학이다. 오늘 내가 살아서 움직이고 뜻을 나누고 정을 나누는 앞의 상대가 없다면 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몸부터 살펴보자 머리, 눈, 귀, 코, 입, 손발, 이 지체들이 하는 일이 각기 다르게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 됨의 철학의 표본이다. 그러니 너와 나라는 것도 하나의 명줄에 붙어 있는 공동의 생명 줄 과도 같은 것이기에 무시하면 곧 자기학대요 포기하면 자멸과 같은 것이다.

그동안 소홀했던 우리의 지난날 생활을 돌이켜 생각을 한번 해 보자. 누구를 만났던 간에 취중에서 실컷 지껄이고 난 다음날 기억되는 대화를 냉정한 입장에서 낱낱이 분석하면서 되새김질 해 보자. 대화의 대부분이 겸손하지 못했던 자신의 오만함과 상대에 대한 배려의 부족 등 지나친 자기표현 등일 것이다. “좀 더 신중 했었더라면” 하는 찜찜한 마음의 자기반성을 해 본 일이 없었다면 이성적인 혹은 지성적인 지체자일 것이다.

나는 간혹 거울을 본다. 책상머리에 큰 거울이 있지만 무심코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고 스치는 것이다. 보면서 처음 느끼는 자기의 모습은 자기가 보기에도 너무 늙어 초췌한 모습에 스스로 놀란다. 생기라고는 찾아 볼 길이 없으니 더 보기가 싫어진다. 그러니 자기의 모습은 젊었을 때의 그 인상 그 모습으로 평소에는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거울을 보는 순간만은 자기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는 순간이다.

그 다음으로 오는 느낌은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게 내면적인 대화로 이어진다. “자네가 다른 곳에서 열나게 지꺼린 그대로 지금 살아가고는 있나” 라는 자문자답을 한번 해 본다.
내 앞에서의 자신의 얼굴 이지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피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화상이다.

얼굴은 몸과 마음의 진열장이다. 여기에 표정이라는 견본 상품을 정리 정돈해 놓고 학력 경력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연출을 하며 살아왔었다. 남들에게는 설사 속여 왔을지언정 자기에게만은 절대 속일 수 없다. 깊은 주름 속마다 숨어 있을 듯한 가증함이나 간교함 그리고 위선과 오만함 아무리 표정을 바꾸어 보아도 숨박꼭질 같은 모양세에 숨겨지지를 않는다. 그러니 삶 자체가 거짓을 참으로 위장 시키는 고도화된 훈련장에서 교관노릇을 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닌가하는 반성도 해 본다.

며칠 전 TV에서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프로그램을 보았다. 성철 스님의 생전의 모습이 나타났다. 유심히 눈을 부릅뜨고 시청하였다. 스님 곁에 많은 여신도들이 한 말씀 듣고 싶어 모였을 때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러하다 “내가 하는 말 다 거짓말이야” 정말 도(道) 통한 그 위에 도 통한 듯한 진실의 말씀이었다. 말로만 전해 들은 바가 있었으나 영상으로 나마 직접보고 들은 듯이 시청하게 되니 감격할 말씀 이었다.

나는 평생 학생들 앞에서 가르친 교육인이었다. 남을 가르쳤으나 스스로를 가르치지 못한 위선자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잘난 재미로 살아왔다면 못난 재미로 살아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보곤 하나 쉽지가 않다. 일방적인 가해자도 만난다.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은 저항의식을 포기하는 주인의식을 상실하는 일과의 분별이 쉽지 않기에 더욱 어렵다.

그러나 생활을 하다보면 조그마한 일에 오해를 살 수 도 있고 부지중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실수에 엄청 수치스런 면박을 받을 때도 간간히 있다. 당일엔 기분이 좀 언짢은 게 어쩔 수 없겠으나 그 다음날은 그 대상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해 왔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생활 속에 조금씩 적응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들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위안과 자부심까지 생기니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아쉬웠던 부분들과 마음 아파왔던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이 글을 시작할 때에는 자신의 반성을 전제로 하여 시작하였으나 쓰다 보니 자신을 너무 노출시켰고 남의 말까지 하였으니 다시 쳐다보아도 미운 내 얼굴이다.( 2012. 6. 20. 새벽, 장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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