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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함석헌, 언론

[김삼웅-제4강] 함석헌-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다.

by anarchopists 2020. 1. 3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3/07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서거20주기, 간디서거61주기 추모학술마당 강연내용-김삼웅]


3.1선언사건 등 반독재투쟁 앞장

유신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비판세력에 족쇄를 채우고 개헌운동을 폭력으로 봉쇄시킬
때에 함석헌은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3.1 명동선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권은 이 일을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가면서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구속했다. 구속자가 함석헌을 비롯, 김대중, 윤보선, 윤반웅, 문익환, 함세웅, 신현봉, 김승훈, 이문영, 서남동 등 1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이어 1979년 3월 1일에는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3.1 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국민의 조직”으로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연합’의 산하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13개 단체가 가입할 만큼 반유신 저항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의 반유신 저항운동은 지칠 줄을 몰랐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지만 유신권력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에서는 치열한 음모와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2.12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1월 24일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백여 명은 △유신정권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또한 △유신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을 일체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검찰은 함석헌을 비롯 박종태, 양순직, 김병걸 등 96명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다.(김삼웅, 내일계속됩니다.)

김삼웅 선생님은
■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계시다가 그후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민주화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과 독립기년관 관장을 지낸바 있으시다. 지금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 선생님은 최근에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을 쓰셨고, 날카로운 필치로 주로 인물평전을 많이 쓰셨다. "안중근평전", "백범김구평전", 녹두전봉준평전", 만해한용운평전", 단재신채호평전" 등이 있으며 지금은 오마이뉴스에 "장준하평전'을 연재하고 계신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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