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의회에서는 긴급조치피해자 구제특별법을 만들어야
유신독재시대의 희생한 자들을 빨리 구제해야 한다.
- 긴급조치 피해자 구제특별법을 만들어야 -
유신독재시대 당시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대한민국이 갈수록 비민주적이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독재부패정치가 고착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장기집권의 권력구조화로 민족적/사회적 위기감을 직감들 하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 한국인들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집권자였던 박정희 독재권력은 〈7.4공동성명〉(1972)을 계기로, 국민의 놀라움과 환희가 있자, 남북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국민총화와 능률의 극대화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영구집권과 권력의 강화를 위한 유신독재권력체제를 준비하는 음모에 들어갔다. 즉 7.4공동성명 후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되고 남북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이념 등 문제로 곧바로 남북대화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박정희권력은 이를 미끼로 불안한 정국을 수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장기집권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야비한 수단으로 함정을 파들어갔다.
당시 국민의 시선이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1972. 8.29)과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1차 회의(1972. 10.12)에 쏠려 있을 때, 박정희는 느닷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전쟁, 폭동 등 비상계엄시기도 아닌데) 또 후속조치로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정당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신문/통신에 대한 사전검열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날강도와 같은 초헌법적인 <비상국무회의>로 하여금 국무회의와 국회의 입법기능까지 수행케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0월유신’이다.(1972.10.17.) 10월유신은 독재권력과 독점자본의 강력한 결합을 물적 토대로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수구세력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를 지향하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회시민운동을 압살해 들어갔다.
이렇게 보았을 때, 10월유신은 박정희의 파쇼적 영구통치를 위해 마련된 서막이었다. 이리하여 비상국무회의가 마련한 헌법개정안(유신헌법)을 비상계엄이 풀리지 않은 채 계도요원으로 하여금, 온갖 기만과 협박으로 국민을 우롱하고 회유한 상태에서 국민투표를 붙여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1972.11.21. 이를 유신체제라 한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헌법을 발가벗겨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키고 유신독재체제를 출범시켰다. 유신헌법은 독재권력에 대한 도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주었다. 이 헌법에 따라 형식적인 국민투표로 선출된 허수아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간접 선출되는 제 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당연히 독재자 박정희가 대통령(영구적 총통제의 시작)이 되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우롱하였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국민들은 이에 속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지식인, 언론인, 학생, 시민들이 유신헌법반대운동을 능동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먼저 학생들은 <민주청년학생연합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벌려 나갔다. 또한 언론인들도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하는 등 저항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 때 박정희는 그의 강력한 정적인 김대중이 일본에서 “유신헌법은 영구총통제를 지향”한다며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벌렸다. 이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시켜 일본에서 강제로 납치(미국의 보호로 바다에 빠져 죽는 뻔한 비극을 면함)하여 자택에 연금시키는 희대의 독재권력의 본보기 사건을 일으킨다.(1973.8.8.)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나라사람들은 울분을 토했고 남북회담도 중단되었다.
이에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종교, 학계, 언론계 대표 30여 명이 '개헌청원운동 전개를 위한 성명'을 채택(1973. 12. 4)하고 장준하를 중심으로 한 야당과 지식인들의 100만인 개헌청원을 위한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삽시간에 3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자, 박정희 독재는 유신헌법의 <긴급조치>조항을 악의적으로 발동하여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 비방행위와 개정ㆍ폐지의 주장, 그리고 헌법의 발의제한, 청원행위를 일체 금지시키는 긴급조치 1호(1974. 1.8)를 시작으로 9호(1975. 5.13)까지 발동하였다. 긴급조치 발령시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없이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킬 수 있고 정부와 법원의 권한도 맘대로 바꿀 수 있었다. 이렇듯 긴급조치를 발령하는 행위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등 긴급조치권은 대통령에게 사실상 헌법개정의 권한을 부여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것이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배경은 베트남의 민족통일과 관련이 깊다. 1975년 외세에 의하여 강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자 일어선 북부베트남의 사회주의자 호찌민(胡志明, 1890.5.19.~1969.9.3)에 의하여 남부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었다.(4. 30, 남북베트남의 공식적 통일선언은 1976년 7월 2일임) 이렇게 사회주의국가 월맹의 주도하에 베트남의 분단이 무너지고 영토통일이 이뤄지자, 자기 이익을 위해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였던 박정희 정권은 전국적으로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대대적으로 반공과 안보를 선전하였다. 그리고 이해 5월 13일에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이렇게 긴급조치는 제4공화국 기간 중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총 9차례 발령되었으며, 그중 긴급조치 9호는 1~8호의 집대성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4년여 동안 지속되었다.(1979. 12. 7 해제) 긴급조치 9호의 발동에 따라 유신헌법의 부정ㆍ반대ㆍ왜곡ㆍ비방ㆍ개정 및 폐기주장ㆍ청원ㆍ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 자체까지 일체 금지되었다. 결국 “긴급조치 자체는 법규적 효력이 없는 박정희 개인의 권력적 사실행위였다.” 이렇듯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동되었지만 유신헌법 반대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1974. 3. 3), 지식인 야당 정치인들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65인 사건>(1975, 3.15),
.1구국선언>(1976. 3. 1) 등 반유신민주화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좀스럽게도 종신권력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종신집권의 디딤돌을 놓았다.(1978. 12. 21) 이에 많은 지식인과 뜻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대한민국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유신헌법 반대운동이 수없이 일어날수록 많은 교수ㆍ학생ㆍ군장사병ㆍ언론인ㆍ종교인ㆍ문인 등 민주인사들이 체포되고 고문을 받고, 투옥되고, 해직이 줄을 이었다. 도저히 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법에 의해 강제된 위반과, 또 이것을 근거로 재판과 판결이 이루어졌으니, 1910년 국치(國恥)보다 더한 민주대한의 수치(羞恥)였다.
더 가관인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사법부의 긴급조치 재판을 좌우지 하였다는 일이다. 당시 공군대위였던 어느 군인이 긴급조치 9호로 군사법정에 섰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중앙정보부에서 공군본부 참모총장(참조: 법무참모)에게 〈0000(이름), 긴급조치 9호 위반, 5년 구형,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언도〉라고 기재된 정식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공군본부 군사법정은 중앙정보부에서 하달한 공문대로 언도를 내렸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재판도 받기 전에 구형과 언도가 이미 대본으로 나와 있다. 재판은 형식이었다.
이제 긴급조치가 얼마나 당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파괴했는지 예를 들어보자. 긴급조치로 처벌 받은 사람 중 절반은 술을 마시고 현실을 비판하다가 투옥된 사람들이다. 또 예배나 법회, 수업 도중에 박정희 정권이나 유신체제를 비판했다고 해서 고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감옥에 끌려 간 사람도 있다. 또 택시를 타고 술김에 운전사에게 박정희나 정부 비판을 하면, 택시기사는 즉각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 그 손님을 경찰에 고발까지 하였다. 교회, 성당, 사찰, 언론사는 늘사복경찰(일명, 사복 또는 파리떼)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가정에서 아들이 유신체제를 비방할라치면 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아들의 입을 막았다. 이렇게 긴급조치 9호는 철저하게 나라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악법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자기모순에 의해 당시 중앙정부장 김재규한테 사살을 당한다. 그러나 신군부 전두환에 의하여 유신통치가 사라지지 않다가. 많은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부활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된다.(2005. 12.1)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자주 집담회ㄹ르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학자들은 “독재를 적나라하게 기획한 문서와 같은 것이었고, 긴급조치는 이러한 기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필요한 권력자 개인의 단독처분을 가능케하는 도구였다”라 규정하였다.(2007.3.28. 김선택)
또 어떤 헌법학교수는 “긴급조치는 악법도 아니고 악법의 모양을 띈 순수한 악 그 자체”이다. "악법과 악의 차이는 사회정의를 근본적으로 위반하느냐의 여부"이며, “악에 있어서는 오남용이 문제가 아니고 법 적용을 제대로 하면 '악'이며, 그 자체로 범죄가 된다.”고 하였다.(2007. 3.28. 한인섭) 그리고 헌법재판소도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 의사 표시는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자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고 국가 안전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핵심적 보장영역 안에 있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를 원천 배제한 긴급조치 조항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부합하지 않고 국가형벌권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침해하는 등 모든 면에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밝혔다.(헌재 2013.3.21. 2010헌바 70)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볼 때 잘못된 유신체제시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유신체제가 잘못이라는 것은 알면서,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어, 삶의 행로가 뒤바꿔버린 희생자들을 구제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같은 나라사람으로써,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다. 일단 재심으로 통하여 형사보상은 받았지만 민사배상(정신적 피해)은 받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다. 긴급조치 관련 민사소송에 대하여 항간에 떠도는 말이 있다. “양심 바른 진보적 성격의 판사를 만나면 보상을 받고, 비양심적인 수구적 판사를 만나면 패소(敗訴)한다”는 말이다. 이건 아니다. 같은 사안인데 누구는 판사를 잘 만나 보상을 받고, 누구는 판사를 잘못 만나 보상을 못 받는다면, 평등과 공평, 그리고 동등의 법정신이 진흙탕처럼 되버리고 만다. 판사는 ‘감정의 이입’에 앞서 ‘공평의 이성’을 앞세워야 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해본다.
1. 정부와 국회는 사법적 판단에만 의존하지 말고 “긴급조치판결 무효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긴급조치로 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판결 자체를 무효화/파기화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보상기준을 만들어 일율적/포괄적인 보상을 해주는 특별법을 제정해 주기 바란다.
2. 국회와 정부는 헌법, 또는 하위의 악법(국가보안법 등)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피해보상을 해줄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다시는 악법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본다.
3. 21대 총선에 나오는 국회의원 후보들은 “긴급조치판결 무효에 관한 특별법”을 공약으로 걸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소멸 시효 6개월’ 문제 때문에 아직 보상신청을 못한 사람, 민사소송에서 잘못된 판사를 만나, 보상을 못받은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걸기 바란다.
4. 현재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붙여주는 ‘민주화운동관련자’라는 명칭을 “민주유공자”로 승격하여 ‘5.18민주유공자’와 동등하게 국가보훈처에 등록함은 물론 상이/비상이를 불문하고 일괄적으로 국가적 혜택도 부여해주어야 한다.
2020. 3.23.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