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종교인, 그대는 윤리적 인간인가?
anarchopists
2019. 12. 6. 00: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3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란 종파의 별(別)없이 한데 묶어 말하면 윤리적 우주관이다...... 종교는 영원을 지향하는 정신적 생명운동”인데, ‘낡아가는 종교는 교리적, 제도적, 피안적, 수세적(체제유지), 내부분열(내분)을 한다.’ “하나님 만나는 거, 알사람 알맘으로 우주의 알짬에 들잔 것”이다. “종교도 점점 이성적으로 되어간다. 종교는 이성의 빛에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이(理)라는 글자가 표시하는 대로 개개의 현상을 초월하는 힘이다. 그런고로 인격적 생명이 발전하는 것은 이것으로써 될 것이다.”(함석헌저작집 14, 『새 시대의 종교』, 한길사, 2009, 40-63쪽 부분 발췌)
대부분의 종교인(homo religiosus 혹은 homo spiritualis)은 자신의 신심을 고백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종교의례를 거행한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열반을 향한 보다 깊은 신심의 행위뿐만 아니라 안정감, 위안, 수양, 심리적 건강 등의 일반 심리적 목적도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의 종교 현상을 보면 종교가 추구하는 본래의 구원이나 열반 혹은 신과의 합일이라는 신앙심보다는 사회적 활동의 연장선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 풍요롭게 하거나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컬트적 소비’(cult consumer/ cult consumption)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세속화의 현상인 것이다.
시대와 정치경제적 환경이 변화할수록 이러한 시민들의 욕구는 더욱 커질 것이고 자신에게 부합하는 종교를 소비하기 위해서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닐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잠정적 종교인인 동시에 모든 신자가 잠정적 종교소비자로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 이성과 의식의 사회적 총합이 저하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가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세계를 성숙시키고 계도함에 따라 시민사회 전체의 이성과 인식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던 때를 감안한다면-종래의 신자들의 순수하게 종교적 가치를 모방하고 추구하던 데서-이제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과 삶의 편리에 따라 종교의 진리를 재단하거나 선택적으로 취하는 자기계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의 배경을 보면, 몇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는데, 먼저 함석헌은 "종교의 미신, 광신은 감정적 신앙이라고 했으며, 감정의 종교는 의식, 제도의 종교, 제사의 종교"라 비판(『새 시대의 종교』, 40쪽)하였다. 그간의 종교 공동체-특히 일부 개신교의 경우-는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인간의 원초적 감정의 발산, 즉 생리적 카타르시스에만 조명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이 마치 그 현상이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을 한 것이다. 신자들은 혹여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경험이 미신이나 광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를 이성적으로 반성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적 종교의 의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이 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의례의 과정과 절차,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들을 통한 감정조차도 작위적이지 않고 신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자유롭고 평안한 감정인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 그 자체의 경험과 감정은 인간의 정신적인 생명운동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경험의 현상이 과연 나를 신의 원형으로 이끄는 정신적인 생명운동인가를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종교 공동체 혹은 신앙 경험을 통해서 나의 정신적인 생명운동의 역동성과 고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의 경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숙고해야만 한다.
만일 종교 공동체가 스스로 종단의 독특한 신앙을 점검하고, 신자들은 이성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함석헌이 내다보았던 낡은 종교가 될 것이다. 낡은 종교는 종단의 교리나 체제를 수호하다 못해 피안세계로 시민들의 마음을 잡아 놓으며 밥그릇 싸움을 일삼다가 내분이 일어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 공동체는 시민의 알맘을 깨닫게 하고 성숙시키며, 우주의 알짬(여럿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핵심 혹은 내용)으로 인도하여 알사람 혹은 알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을 만나는 것이고, 신을 만난 표징이라는 것을 보다 확실히 말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과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알려주고 깨닫게 해주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고 공동체의 교리나 체제 수호를 위해 안일하게 대처하게 된다면 종교는 시민들에게서 보다 더 멀어지는 존재가 돼버릴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는 철저하게 이성의 빛에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 종교가 아무리 초월자에 대한 경험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 초월적인 경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피고,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려면 신이
인간에게 주입한 이성의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검증되지 못한 종교적 경험-여기서 검증되지 못했다는 말은 초월자와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무질서를 가져오는 이탈 현상과도 같은 것을 말한다-은 사회적 공동체 모두에게 낯설다. 낯선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사회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순수한 종교적 경험을 했다고 하는 것은, 함석헌의 시각에서 볼 때, 윤리적 존재로서 인격적 생명을 퍼뜨리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건전한 종교의 모습인 것이다. 소리만 높이 지르고, 자신의 종단만이 옳다는 괜한 자긍심만으로는 타인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또한 자칫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종교 공동체 자신들만의 리그라고 시민들은 떼 지어 빈정댈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아무도 동감하지 못하는 종교는 앞으로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종교는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복할 수 있어야 참다운 진리를 담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영원을 지향한다고 해서 이웃의 필요와 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이 속한 종단의 진리만을 폭압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여 말하려고 하는 자세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참다운 종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을 지향하여 초월자를 만났다는 표징을 보이는 길은 오래된 경전을 달달 외우거나, 목소리를 뇌까리다 못해 목청을 높여 소리 질러대며 공공장소에서 안하무인으로 포교를 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윤리적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011. 10.30, 김대식).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아래 사진은 연합뉴스(2011. 2)에서 따온 것임
모든 종교인(homo religiosus)은
엄밀한 윤리적 인간(homo ethicus)이 되어야 한다!
엄밀한 윤리적 인간(homo ethicus)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인(homo religiosus 혹은 homo spiritualis)은 자신의 신심을 고백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종교의례를 거행한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열반을 향한 보다 깊은 신심의 행위뿐만 아니라 안정감, 위안, 수양, 심리적 건강 등의 일반 심리적 목적도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의 종교 현상을 보면 종교가 추구하는 본래의 구원이나 열반 혹은 신과의 합일이라는 신앙심보다는 사회적 활동의 연장선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 풍요롭게 하거나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컬트적 소비’(cult consumer/ cult consumption)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세속화의 현상인 것이다.
시대와 정치경제적 환경이 변화할수록 이러한 시민들의 욕구는 더욱 커질 것이고 자신에게 부합하는 종교를 소비하기 위해서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닐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잠정적 종교인인 동시에 모든 신자가 잠정적 종교소비자로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 이성과 의식의 사회적 총합이 저하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가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세계를 성숙시키고 계도함에 따라 시민사회 전체의 이성과 인식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던 때를 감안한다면-종래의 신자들의 순수하게 종교적 가치를 모방하고 추구하던 데서-이제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과 삶의 편리에 따라 종교의 진리를 재단하거나 선택적으로 취하는 자기계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의 배경을 보면, 몇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는데, 먼저 함석헌은 "종교의 미신, 광신은 감정적 신앙이라고 했으며, 감정의 종교는 의식, 제도의 종교, 제사의 종교"라 비판(『새 시대의 종교』, 40쪽)하였다. 그간의 종교 공동체-특히 일부 개신교의 경우-는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인간의 원초적 감정의 발산, 즉 생리적 카타르시스에만 조명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이 마치 그 현상이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을 한 것이다. 신자들은 혹여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경험이 미신이나 광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를 이성적으로 반성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적 종교의 의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이 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의례의 과정과 절차,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들을 통한 감정조차도 작위적이지 않고 신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자유롭고 평안한 감정인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 그 자체의 경험과 감정은 인간의 정신적인 생명운동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경험의 현상이 과연 나를 신의 원형으로 이끄는 정신적인 생명운동인가를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종교 공동체 혹은 신앙 경험을 통해서 나의 정신적인 생명운동의 역동성과 고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의 경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숙고해야만 한다.
만일 종교 공동체가 스스로 종단의 독특한 신앙을 점검하고, 신자들은 이성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함석헌이 내다보았던 낡은 종교가 될 것이다. 낡은 종교는 종단의 교리나 체제를 수호하다 못해 피안세계로 시민들의 마음을 잡아 놓으며 밥그릇 싸움을 일삼다가 내분이 일어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 공동체는 시민의 알맘을 깨닫게 하고 성숙시키며, 우주의 알짬(여럿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핵심 혹은 내용)으로 인도하여 알사람 혹은 알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을 만나는 것이고, 신을 만난 표징이라는 것을 보다 확실히 말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과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알려주고 깨닫게 해주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고 공동체의 교리나 체제 수호를 위해 안일하게 대처하게 된다면 종교는 시민들에게서 보다 더 멀어지는 존재가 돼버릴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는 철저하게 이성의 빛에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 종교가 아무리 초월자에 대한 경험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 초월적인 경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피고,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려면 신이
그러나 그 사람이 순수한 종교적 경험을 했다고 하는 것은, 함석헌의 시각에서 볼 때, 윤리적 존재로서 인격적 생명을 퍼뜨리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건전한 종교의 모습인 것이다. 소리만 높이 지르고, 자신의 종단만이 옳다는 괜한 자긍심만으로는 타인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또한 자칫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종교 공동체 자신들만의 리그라고 시민들은 떼 지어 빈정댈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아무도 동감하지 못하는 종교는 앞으로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종교는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복할 수 있어야 참다운 진리를 담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영원을 지향한다고 해서 이웃의 필요와 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이 속한 종단의 진리만을 폭압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여 말하려고 하는 자세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참다운 종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을 지향하여 초월자를 만났다는 표징을 보이는 길은 오래된 경전을 달달 외우거나, 목소리를 뇌까리다 못해 목청을 높여 소리 질러대며 공공장소에서 안하무인으로 포교를 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윤리적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011. 10.30,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