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종교의 외형과 참에 대한 물음

anarchopists 2019. 10. 26. 02:3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06/2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외형과 참에 대한 물음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일정한 종교를 갖는다거나 종교적 신념을 표방하는 것에 대해서 특정 종교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 마치 그 종교적 색깔, 그 종교의 신념을 절대적으로 자기화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종교를 선택하고 종교적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보다는 우연이고, 강제보다는 자유로운 자기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함석헌을 두고 이런저런 시각으로 평가를 내려 보지만, 사실상 그의 종교적 색깔론은 단 하나의 색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스펙트럼이 넓다. 처음에 그가 퀘이커가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오해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확히 퀘이커가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느 특정 종교에 매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종교는 초월자 혹은 깨달음에 이른 초월적 자아에 대한 이름 붙이기이지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초월자란 물음을 던지고 답변을 구하는 나의 판단과 지향, 그리고 잣대일 수는 있어도, 그 존재에 대해서 특정 이름을 붙여서 절대화하는 것은 그를 상대적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초월적 존재는 특정 이름을 붙이고 그 범주로 한정지을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러한 종교를 신봉하는 신자 역시 종교를 통해서 의식과 정신, 그리고 초월의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초월적 존재를 유한한 언어로 묶어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일정한 종교를 갖는다고 해서 그 종교에 헌신한 이유 혹은 그 종교로 인해서 나의 의식과 정신마저도 제한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함석헌은 마음의 거침이 없음, 자기 동일성, 자기 동일적 자아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종교적 생활을 하고 종교적 신념을 가지면서 견지해야 할 자세이다. 한 인간이 어느 특정 이름이 붙은 종교를 선택한다고 해서 거기에 사로 잡혀 아집과 편견으로 일관한다거나, 자기의 동일성과 인간의 보편성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면 사실상 종교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잃고 사는 것이다.


‘내가 진정한 나이도록 하는 것’, ‘내가 나대로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억지로 뜯어 고치도록 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종교는 함석헌이 말한 대로 “무엇이 돼서 된 것이 아니라, 됨이 없이 되어진 것”이라는 역설과 자연스러움이어야 한다. 되고자 하는 인위적 의지가 아니라 시나브로 되는 것이다. 종교인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듯이 삶을 사는 것,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되지 않아도 초월자에 대해서 이끌려지는 것, 인간이 되는 것,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으로 되어가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방향성이어야 한다. 하지만 종교는 자신의 언명과 언표에 따라서 인간을 만들려고 한다. 그 계획과 목표가 사람됨이라고 하는 과정적 교육과 지향성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갖고 있는 성격이 초월자의 의지와 인도가 아니라 인위성에 입각한 되어감이라면 문제가 있다. 종교는 인간이 가진 ‘자기 자신이 됨’을 발견하고, 그러한 자기 자신이 됨, 진정한 자기 동일성의 자아를 간취하지 못한 인간을 계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언명과 언표에 의한 명령과 지시, 강제와 강압은 인간이 가진 자신의 내면성과 자기 동일성을 깨닫게 하기 보다는 왜곡하게 만든다.


“나는 되자는 것이지 되자는 목적과 그것을 위해 하는 힘씀이 없다면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되고 되고 한없이 끝없이 되자는 것이야말로 사람입니다. 돼도 돼도 참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을 돼보자고 시시각각으로 기를 쓰고 애를 쓰는 것이 삶이란 것입니다.” 함석헌의 말이다. 존재의 도래에 대한 개방성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 되려고 할 뿐이지 존재 도래를 빙자하여 종교 언표의 절대성을 자기 동일성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종교적 언표는, 특정 종교의 언명은 존재 도래를 담는 형식과 틀일 뿐이지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게 될 경우에는 종교 스스로 오만과 오류에 빠지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도 존재 도래를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 존재 도래를 알려주는 미완의 과정으로서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자체도 존재 도래로 완성되어 가야 하는 인간 도야의 형식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헌은 자신이 퀘이커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퀘이커라고 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퀘이커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사태, 하나의 행위라고는 할 수 있으나, 그 종교를 자신의 진정성으로 흡수하고 일체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질적 퀘이커와 형식적 퀘이커의 차이점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종교라고 해도 자신의 실질적인 종교적 욕구와 관념을 다 표현해 주는 종교가 있을 수는 없다. 종교는 그저 나의 됨과 나의 자아를 성숙 발전시키고 함양하는 방편에 불과하다. 동일한 선상에서 종교와 인간은 과정적으로 ‘됨’(be-coming)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 종교의 외형이 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종교는 참을 형식화하고 참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과 기능을 한다. 따라서 종교 자체가 참은 아니다.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서이다. 또한 종교 자체가 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종교 그 자체가 추구하는 내용은 참이기 때문에 그 참을 자기화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참을 자기화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천도교 등이 표방하는 진리 체계를 체화하는 것은 참을 향한 길인데, 종교인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나는 무슨 종교인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참을 지금 체화하는 중이고 그 종교적 본질을 참으로 여기고 일치하여 살아가려고 한다는 책임적 발언이어야 한다. 이것은 “나는 퀘이커가 되자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만 아니라 무엇이 되자고 온 것도 아닙니다. 종교가 나 위해 있지 내가 종교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함석헌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치 종교인이 입버릇처럼 우연적 사건을 필연적 사건으로 고백하는 발언에 대해서, 나의 종교적 언표와 언명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무슨 교(敎)를 믿기 위해서 그런 것처럼 고백하고 인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느 특정 종교를 내가 믿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것이 나의 인간됨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나의 나됨,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한 것이지, 종교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하면 안 된다.


다만 나는 작은 나로서 큰 나인 초월자 안에 있다. 종교 때문에 작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큰 나가 있기 때문에 작은 내가 있다. 그 큰 나가 내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 큰 나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다. 나를 나라고 고백하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큰 나가 있을 때 가능하다. 만일 특정 종교가 말하는 발언에 큰 나가 없다면, 큰 나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작은 나는 그 종교 체계에 헌신을 약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정 종교의 언표와 언명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넘어선, 특정 종교의 언표와 언명마저도 넘어선 초월자, 본래의 그것, 본질적인 존재를 찾아야 한다. 퀘이커이든 불교이든 유교이든 이슬람교든 종교는 찾기 위해서 존재하고 찾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는지, 불교인이 되었는지, 유교인이 되었는지, 이슬람교인이 되었는지 그 까닭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까닭을 답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까닭이 없다.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그 까닭은 그저 찾아갈 뿐이다. 그 찾아가는 궁극적인 목적과 존재, 그 근거는 까닭-없이-존재하는 이다.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찾아가다가 보면 마지막에 맞닥뜨리는 존재론적 물음은 ‘까닭-없이-존재하는 이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이다. 그렇다. 내가 특정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체화하는 과정적 존재로 살아가는 까닭은 까닭-없이-존재하는 이에 의해서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없이 존재 하는 것이다. 없이 존재하되 까닭이 없다. 그래서 까닭-없이-존재하는 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름을 붙이 말아야 한다. 종교의 이름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아야 한다. 종교적 발언에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까닭-없이-존재하는 이만을 보게 될 것이다.


흔히 철학은 물음을 던지고 종교는 대답을 한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좀 더 심오한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궁극적인 해답을 찾아가도록 물음을 던진다. 함석헌도 이를 인정한다. “물음으로 대답하고 대답으로 묻는 것이 참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인과론적 설명을 통해 해명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심지어 종교적 현상에 대해서도 과학적 설명을 통해서 밝혀보려고 한다. 초월자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은 거꾸로 대답(까닭) 없이 던지는 질문 속에서 참을 발견하게 된다는 역설적 이치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종교인은 어찌 그렇게 대답만 잘 하는 것일까? 정녕 까닭-없이-존재하는 이를 찾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인 까닭에 대한 답변조차 논할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으리라.


글쓴이_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