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4강] 함석헌의 역사인식- 당시 사학계의 평가
anarchopists
2020. 2. 4. 01: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9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은 자신이 “조선역사”를 연재할 당시의 한국사학계를 ‘사학계라 할 것도 없다’고 평가한 바 있다.1) 그는 “조선역사”가 사학계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겸양하였으나, “조선역사”가 해방될 때까지 10년 동안 ‘역사를 쓰는 이들로부터 묵살’당한데 대한 섭섭한 감정도 드러냈으나, 성서조선사건으로 피체되었을 때의 일화를 들며 결국 고난의 역사가 승리한 것이라고 자평하였다.
그는 당시의 학풍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우리 역사에서 영웅과 찬란한 문화를 통해 민중의 분발을 촉구하고자 한 민족주의사학의 ‘영휘(榮輝) 있는 조국의 역사’ 교육을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 … 나는 6, 7년 이래 중등 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음으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까 하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 어렸을 때 듣던 모양으로 을지문덕, 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려 힘썼으나 그것으로써 묻어버리기에는 조선 역사 전체에서 발하는 신음의 소리는 너무도 컸다.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생생자(生生字), 구선(구선(龜船)), 석굴암(石窟庵), 다보탑(多寶塔)을 총출동을 시켜서 관병식을 거행해 보려 하였으나 그것으로써 숨겨버리기에는 속에 있는 남루(襤樓)가 너무 심했다. 드디어 나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의 ‘영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까달았다. …”2)
또한 그는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사관이 지니는 진리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 아니며 그 배후에 있는 사회, 즉 민족적 배경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는 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서의 루터라는 것이다.3) 우리 역사에도 영웅이 있었지만, 그 영웅만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영웅을 배태한 시대와 민족적 배경을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견해는 초기 영웅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한 신채호나 박은식, 문화사학의 관점에서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한 황의돈, 권덕규, 장도빈, 최남선의 사학 경향까지 함께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그는 영웅사관과 함께 당시 크게 유행하고 있던 계급사관에 대하여도 비판적이었다. 기독교사관을 지니고 있던 그가 유물사관에 토대한 계급사관을 비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역사에서 이해관계가 역사변천의 동인이 되어 왔고, 역사상 지배와 피지배 계급이 대립하여, 각 계급이 이익을 추구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영속적인 자기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국부적 진실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 … 그 계급은 항상 신진대사가 되어 왔다. 고로 전연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계속하는 계급의 대립이 있으나 구체적 사실에 있어서는 단군시대의 지배계급과 오늘날의 지배계급과를 동일한 자아의식 속에 통일하여 ‘우리’라는 1인칭을 쓰게 될 수 있겠는가 하면 전연 불능이다. 그러나 민족은 그렇지 않다. … ”5)
한편 그는 1934년 진단학회의 창립과 더불어 새로운 학풍으로 각광을 받던 실증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역사를 ‘과거 사실의 기록’이라 정의하면서도, 이 ‘조잡한 정의’를 수정하는 것으로부터 역사의 정당한 이해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고 하였다. 즉, 이미 죽어버린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살아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사실이라는 것은 현재와의 관련 하에 ‘선택된 사실’로서, 사실이라고 판단되고 해석된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요컨대 그는 과거와 사실에서의 현재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었다. 기록 또한 사실과 사실 간에 인과적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적으로 재현시킨 것으로서 기록이라기보다는 해석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곧 기록은 ‘일종의 예술적 창작’이라는 표현이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적 진실을 자연과학적 기술에 있는 줄 아는 것은 대착오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과거의 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의 기록에만 그친 것을 ‘수백 권의 납골당(納骨堂) 명록(名錄)’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민중의 역사로서, 해석의 역사를 추구하고자 하였고, 참된 역사가의 임무는 한 권의 민중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역사가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참 역사가의 사명은 그 자료를 써가지고 한 그릇 진미를 조진하는데 있다. 한 권의 민중의 역사를 써낸 후에야 그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가의 생명은 기록에 있지 않고 그 판단에 있다. 인간사회의 훈류기면(蒸溜器面)에 피어오르는 무정형(無定形)한 사상(事象)의 증기를 냉각시켜서 한 정형을 주는 것이 그 일이다. …”6)(박걸순)
<참고문헌>
"咸錫憲全集" 1, 16~17쪽, 「네째판에 부치는 말」.
《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9쪽.
《聖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5~6쪽.
박걸순, '韓國近代史學史硏究", 269쪽.
《聖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6쪽.
《聖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11쪽.
당시 한국사학계에 대한 평가
함석헌은 자신이 “조선역사”를 연재할 당시의 한국사학계를 ‘사학계라 할 것도 없다’고 평가한 바 있다.1) 그는 “조선역사”가 사학계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겸양하였으나, “조선역사”가 해방될 때까지 10년 동안 ‘역사를 쓰는 이들로부터 묵살’당한데 대한 섭섭한 감정도 드러냈으나, 성서조선사건으로 피체되었을 때의 일화를 들며 결국 고난의 역사가 승리한 것이라고 자평하였다.
그는 당시의 학풍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우리 역사에서 영웅과 찬란한 문화를 통해 민중의 분발을 촉구하고자 한 민족주의사학의 ‘영휘(榮輝) 있는 조국의 역사’ 교육을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 … 나는 6, 7년 이래 중등 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음으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까 하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 어렸을 때 듣던 모양으로 을지문덕, 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려 힘썼으나 그것으로써 묻어버리기에는 조선 역사 전체에서 발하는 신음의 소리는 너무도 컸다.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생생자(生生字), 구선(구선(龜船)), 석굴암(石窟庵), 다보탑(多寶塔)을 총출동을 시켜서 관병식을 거행해 보려 하였으나 그것으로써 숨겨버리기에는 속에 있는 남루(襤樓)가 너무 심했다. 드디어 나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의 ‘영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까달았다. …”2)
또한 그는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사관이 지니는 진리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 아니며 그 배후에 있는 사회, 즉 민족적 배경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는 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서의 루터라는 것이다.3) 우리 역사에도 영웅이 있었지만, 그 영웅만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영웅을 배태한 시대와 민족적 배경을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견해는 초기 영웅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한 신채호나 박은식, 문화사학의 관점에서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한 황의돈, 권덕규, 장도빈, 최남선의 사학 경향까지 함께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그는 영웅사관과 함께 당시 크게 유행하고 있던 계급사관에 대하여도 비판적이었다. 기독교사관을 지니고 있던 그가 유물사관에 토대한 계급사관을 비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역사에서 이해관계가 역사변천의 동인이 되어 왔고, 역사상 지배와 피지배 계급이 대립하여, 각 계급이 이익을 추구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영속적인 자기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국부적 진실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 … 그 계급은 항상 신진대사가 되어 왔다. 고로 전연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계속하는 계급의 대립이 있으나 구체적 사실에 있어서는 단군시대의 지배계급과 오늘날의 지배계급과를 동일한 자아의식 속에 통일하여 ‘우리’라는 1인칭을 쓰게 될 수 있겠는가 하면 전연 불능이다. 그러나 민족은 그렇지 않다. … ”5)
한편 그는 1934년 진단학회의 창립과 더불어 새로운 학풍으로 각광을 받던 실증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역사를 ‘과거 사실의 기록’이라 정의하면서도, 이 ‘조잡한 정의’를 수정하는 것으로부터 역사의 정당한 이해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고 하였다. 즉, 이미 죽어버린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살아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사실이라는 것은 현재와의 관련 하에 ‘선택된 사실’로서, 사실이라고 판단되고 해석된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요컨대 그는 과거와 사실에서의 현재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었다. 기록 또한 사실과 사실 간에 인과적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적으로 재현시킨 것으로서 기록이라기보다는 해석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곧 기록은 ‘일종의 예술적 창작’이라는 표현이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적 진실을 자연과학적 기술에 있는 줄 아는 것은 대착오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과거의 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의 기록에만 그친 것을 ‘수백 권의 납골당(納骨堂) 명록(名錄)’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민중의 역사로서, 해석의 역사를 추구하고자 하였고, 참된 역사가의 임무는 한 권의 민중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역사가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참 역사가의 사명은 그 자료를 써가지고 한 그릇 진미를 조진하는데 있다. 한 권의 민중의 역사를 써낸 후에야 그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가의 생명은 기록에 있지 않고 그 판단에 있다. 인간사회의 훈류기면(蒸溜器面)에 피어오르는 무정형(無定形)한 사상(事象)의 증기를 냉각시켜서 한 정형을 주는 것이 그 일이다. …”6)(박걸순)
<참고문헌>
"咸錫憲全集" 1, 16~17쪽, 「네째판에 부치는 말」.
《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9쪽.
《聖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5~6쪽.
박걸순, '韓國近代史學史硏究", 269쪽.
《聖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6쪽.
《聖書朝鮮》제65호, 1934년 6월호, 11쪽.
박걸순
박걸순교수는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박걸순교수는 독립기념관 학예실장을 거쳐 지금 충복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계신다.
위글은 지난 해 함석헌교실에서 한 강의를 그대로 옮겨실었다. /함석헌평화포럼
위글은 지난 해 함석헌교실에서 한 강의를 그대로 옮겨실었다. /함석헌평화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