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이거룡 5강] 나의 길, 역마살의 축복
anarchopists
2020. 1. 23. 02:4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23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5강]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비행기 동체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듀랄루민'이라는 가볍고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다고 배웠는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아무리 날개에 성능 좋은 제트엔진을 달고 듀랄루민으로 가벼워진 몸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막상 활주로에 몸을 뉘인 그 큰 덩치를 보면,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들과 이미 실었을 그 무거운 짐들을 생각하면,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에게 불가사의다. 그 큰 덩치의 이륙과 비행은 나에게 다만 기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무거워진 몸을 느낄 때, 시시각각으로 내리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느낄, 나는 가끔 활주로 위에 맥없이 누운 비행기를 생각한다.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큰 덩치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나의 현존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문득 이 무거운 중력을 떨치고 이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실마리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장발 수염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다. 장발 수염을 빼고 나면 내가 아닌 것처럼, 인도를 빼고 나면 내가 아니다. 이미 인도는 내 정체의 일부가 된 셈이다. 사람들은 내 이름 앞에 인도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심지어는 인도철학박사라는, 있지도 않은 말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내가 인도철학자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작정하고 철학자가 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철학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철학공부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단지 내 마음이 지향하는 곳을 따라 이리저리 흐르다 보니 지금 철학자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인도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지금도 대답이 궁색하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좋을 뿐이다. 좋다는 것은 기쁘다는 것이고, 기쁘다는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진짜’ 철학자가 철학을 재미로 하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도철학이 재미있다. 인도철학은 참으로 묘한 구석이 많다. 묘하다는 건 곳곳에 감추어진 뭔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처음 같고 재미가 있다. 사실이 그렇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것이지 여기에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유가 있다면, 그건 이미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인도가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었다. 인도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차츰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다가 ‘아예 인도로 가자’는 생각이 들어 훌쩍 떠났다. 등산가방 하나 달랑 매고 곧장 마드라스대학 철학과로 찾아갔다. 마드라스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라마누자(Rāmānuja)라는 사상가의 고향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천여 년 전의 그를 통하여 나의 생각, 나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나에게 인도철학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인도철학은 수 천 킬로미터 바깥의 먼 나라 사람들의 사상, 그것도 요즘 생각이 아니라 주로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것이 먼 나라의 아주 오래된 사상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인도철학은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沈潛)하는 사람들의 발자취, 내면으로의 침잠이 곧 우주로의 확산임을 보여주는 삶의 노정이다.
흔히 인도사상 하면 신비니 초월이니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지만, 그 의미는 좀 새겨봐야 한다. 여기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결코 비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도사상만큼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은 드물다. 그건 죽어서 뭘 이루자는 게 아니다. 먹고 자고 똥 싸며 사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자는 것도 아니다. 일상은 일탈을 위하여 있다.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륙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일탈을 위하여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는 언제나 일탈의 끄트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일탈을 위하여 있다고 해서 일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는 과정 없이 비행기의 이륙이 어려운 것처럼, 일상 없이 일탈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류의 흐름이 일상이라면, 불꽃은 일탈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불꽃이라면, 전류의 흐름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불꽃을 일으킬 때 의미를 지니며, 전류의 흐름이 막힐 때, 저항이 있을 때 불꽃이 일어난다.
어떤 알 수 없는 느낌에 나를 맡기게 되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내가 가는 인도철학의 길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를 끄는 알 수 없는 느낌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왜?’라고 묻지 않으며, 물을 필요도 없다. 수년 전에 세상 뜬 미당의 말처럼, "아직 덜되어서 더 되려고 방랑하는 떠돌이"가 나의 본심이고 삶이며 철학이다. 이 방랑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이생 어디쯤에서나 끝나게 될지, 아니면 다음, 그 다음 생에서나 끝나게 될지 모르는 방랑이다. 그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나의 역마살을 시험하고 다독거리며 떠돌 것이다. 역설과 모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나를 시험할 것이다. (이거룡, 끝)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후 인도 마드라스 대학 라다크리슈난 연구소(석사), 델리대학 대학원(박사)를 졸업했다. 'EBS 세상보기' 강좌를 통해 심원한 인도의 사상과 문화를 쉽고 생동감 있게 다룬 바 있다. 현재 서울 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있으며 인도학교를 개설 중이다. 저서로는 라다크리슈난의 명저 <인도철학사>(전4권, 한길사)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저서로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와 공저로 <논쟁으로 본 불교철학> <구도자의 나라>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내일부터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김영호 선생님의 글이 나갑니다.
[이거룡, 제5강]
나의 길, 역마살의 축복
나는 지금도 비행기가 어떻게 땅에서 뜨는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앞날개에 제트엔진이 달려있어서 마치 고무풍선에 가득 채워진 바람이 일시에 빠질 때 풍선이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비행기도 그렇게 이륙하고 비행한다는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비행기 동체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듀랄루민'이라는 가볍고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다고 배웠는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아무리 날개에 성능 좋은 제트엔진을 달고 듀랄루민으로 가벼워진 몸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막상 활주로에 몸을 뉘인 그 큰 덩치를 보면,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들과 이미 실었을 그 무거운 짐들을 생각하면,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에게 불가사의다. 그 큰 덩치의 이륙과 비행은 나에게 다만 기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무거워진 몸을 느낄 때, 시시각각으로 내리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느낄, 나는 가끔 활주로 위에 맥없이 누운 비행기를 생각한다.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큰 덩치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나의 현존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문득 이 무거운 중력을 떨치고 이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실마리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장발 수염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다. 장발 수염을 빼고 나면 내가 아닌 것처럼, 인도를 빼고 나면 내가 아니다. 이미 인도는 내 정체의 일부가 된 셈이다. 사람들은 내 이름 앞에 인도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심지어는 인도철학박사라는, 있지도 않은 말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내가 인도철학자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작정하고 철학자가 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철학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철학공부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단지 내 마음이 지향하는 곳을 따라 이리저리 흐르다 보니 지금 철학자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인도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지금도 대답이 궁색하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좋을 뿐이다. 좋다는 것은 기쁘다는 것이고, 기쁘다는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진짜’ 철학자가 철학을 재미로 하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도철학이 재미있다. 인도철학은 참으로 묘한 구석이 많다. 묘하다는 건 곳곳에 감추어진 뭔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처음 같고 재미가 있다. 사실이 그렇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것이지 여기에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유가 있다면, 그건 이미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인도가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었다. 인도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차츰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다가 ‘아예 인도로 가자’는 생각이 들어 훌쩍 떠났다. 등산가방 하나 달랑 매고 곧장 마드라스대학 철학과로 찾아갔다. 마드라스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라마누자(Rāmānuja)라는 사상가의 고향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천여 년 전의 그를 통하여 나의 생각, 나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나에게 인도철학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인도철학은 수 천 킬로미터 바깥의 먼 나라 사람들의 사상, 그것도 요즘 생각이 아니라 주로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것이 먼 나라의 아주 오래된 사상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인도철학은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沈潛)하는 사람들의 발자취, 내면으로의 침잠이 곧 우주로의 확산임을 보여주는 삶의 노정이다.
흔히 인도사상 하면 신비니 초월이니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지만, 그 의미는 좀 새겨봐야 한다. 여기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결코 비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도사상만큼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은 드물다. 그건 죽어서 뭘 이루자는 게 아니다. 먹고 자고 똥 싸며 사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자는 것도 아니다. 일상은 일탈을 위하여 있다.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륙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일탈을 위하여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는 언제나 일탈의 끄트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일탈을 위하여 있다고 해서 일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는 과정 없이 비행기의 이륙이 어려운 것처럼, 일상 없이 일탈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류의 흐름이 일상이라면, 불꽃은 일탈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불꽃이라면, 전류의 흐름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불꽃을 일으킬 때 의미를 지니며, 전류의 흐름이 막힐 때, 저항이 있을 때 불꽃이 일어난다.
어떤 알 수 없는 느낌에 나를 맡기게 되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내가 가는 인도철학의 길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를 끄는 알 수 없는 느낌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왜?’라고 묻지 않으며, 물을 필요도 없다. 수년 전에 세상 뜬 미당의 말처럼, "아직 덜되어서 더 되려고 방랑하는 떠돌이"가 나의 본심이고 삶이며 철학이다. 이 방랑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이생 어디쯤에서나 끝나게 될지, 아니면 다음, 그 다음 생에서나 끝나게 될지 모르는 방랑이다. 그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나의 역마살을 시험하고 다독거리며 떠돌 것이다. 역설과 모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나를 시험할 것이다. (이거룡, 끝)
이거룡님은
/함석헌평화포럼
* 내일부터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김영호 선생님의 글이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