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오늘의 명상] 대학로의 실개천
anarchopists
2020. 1. 9. 00:4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가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누구나 실개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보자기 가방 메고
십리 길을 동무들과 걸어오며 실개천에 흐르는 물 그대로를
나뭇잎에 떠 마시던 추억과 함께.
대학로 원주민으로서 실개천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설렜다.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은 아닐지라도 밤낮으로 졸졸 흐르는 도랑물을
매일 오가며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적잖이 흥분되기도 했다.
얼마 후, 언론에서 대학로에 실개천이 생겼다고 요란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나갔다 난 실소를 금치 못하고 말았다.
'지금 시민들에게 장난 하십니까?'
졸속 행정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대상은 누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소리쳐 묻고 싶었다.
손바닥 만한 실개천에 졸졸은 커녕 갓난아기 오줌 줄기 정도의 물이
간신히 흘러 갈 뿐이었다. 차라리 작은 화단이 나을 뻔 했다.
그 후에 나가다 보면 실개천엔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바닥에 노루오줌만큼 남은 물은 금세 오염되어 악취가 났다. 이어 바닥의 돌들은 푸른 이끼가 끼어 흉측한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대학로의 실개천은 매연 속에서 신병을 앓고 있었다.
어제 나는 외출하다 말고 실개천의 또 다른 풍경을 보고 말았다.
긴 장화를 신은 아저씨가 발등에 찰까말까한 실개천에 들어가 돌멩이에 붙은 이끼를
플라스틱 빗자루로 박박, 긁어대고 있는 게 아닌가.
문화의 거리, 대학로 한복판에서 푸른 이끼를 긁어내고 있는 아저씨의 눈길은 왠지 허망해 보였다.
나 또한 서글픈 실개천의 풍경을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 건지. 가슴이 아리다.
(2010.10.4., 박경회)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포럼>의 새필진으로 극동방송 방송작가인 박경희 작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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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다움에서 따온 것임
대학로의 실개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가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누구나 실개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보자기 가방 메고
십리 길을 동무들과 걸어오며 실개천에 흐르는 물 그대로를
나뭇잎에 떠 마시던 추억과 함께.
대학로 원주민으로서 실개천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설렜다.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은 아닐지라도 밤낮으로 졸졸 흐르는 도랑물을
매일 오가며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적잖이 흥분되기도 했다.
얼마 후, 언론에서 대학로에 실개천이 생겼다고 요란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나갔다 난 실소를 금치 못하고 말았다.
졸속 행정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대상은 누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소리쳐 묻고 싶었다.
손바닥 만한 실개천에 졸졸은 커녕 갓난아기 오줌 줄기 정도의 물이
간신히 흘러 갈 뿐이었다. 차라리 작은 화단이 나을 뻔 했다.
그 후에 나가다 보면 실개천엔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바닥에 노루오줌만큼 남은 물은 금세 오염되어 악취가 났다. 이어 바닥의 돌들은 푸른 이끼가 끼어 흉측한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대학로의 실개천은 매연 속에서 신병을 앓고 있었다.
어제 나는 외출하다 말고 실개천의 또 다른 풍경을 보고 말았다.
긴 장화를 신은 아저씨가 발등에 찰까말까한 실개천에 들어가 돌멩이에 붙은 이끼를
플라스틱 빗자루로 박박, 긁어대고 있는 게 아닌가.
문화의 거리, 대학로 한복판에서 푸른 이끼를 긁어내고 있는 아저씨의 눈길은 왠지 허망해 보였다.
나 또한 서글픈 실개천의 풍경을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 건지. 가슴이 아리다.
(2010.10.4., 박경회)
박경희 작가님은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포럼>의 새필진으로 극동방송 방송작가인 박경희 작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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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다움에서 따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