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민중의 뜻이 존재할 권리

anarchopists 2019. 10. 26. 02:3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06/1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민중의 뜻이 존재할 권리



인간에게 무(無, Nichts) 속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인간은 유(有, Sein/Besitz)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꾸 고착화되거나 안주하면서 변화를 싫어한다. 하지만 역사는 흐른다. 아니 역사는 인간의 물음과 대답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의 연속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처럼,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시간성 안에 있는 인간 현존재는 불안(Angst)이라는 실존적인 무의 상태에서 무언가를 의지하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사물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 명예나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필경은 종교, 곧 존재자의 존재, 최고의 존재자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란 초월자와 인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언어, 즉 말씀이라는 매개체가 요구된다. 말씀은 뜻이다. 뜻은 물질과 짝할 수 없다. 뜻은 정신이기 때문이다. 뜻 없이 살 수 없듯이 말씀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현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현존재의 존재성은 시간성이라는 역사 속에서 초월자와 인간의 대화를 통한 말씀에 의해서 규정되어진다.


그렇다면 그 말씀의 근본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사랑이다. 초월자와 인간의 대화인 역사적 시간성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것의 충만이 교(敎)로 나타난다. 가르침, 최고의 가르침은 사랑에 있다. 가르침에는 하늘과 민중의 물음과 대답이 오가면서 이루어지는 초월자의 자기 개방성, 자기 개시가 아닐까? 그런데 그러한 초월자의 뜻은 감추어져 있다. 뜻의 은폐성으로 민중이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물음 속에서 초월자의 뜻이 탈은폐된다. 그러므로 물어야 한다. 민중은 묻고 또 물어야 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하늘의 뜻이 자신의 삶으로 다가오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뜻은 곧 민중에게 답이 되며 실존적 삶의 의미와 근거가 된다. 그런데 민중은 묻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쩌면 민중은 묻는 방법을 모르는지 모른다. 그것이 민중의 숙명인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민중이 물을 수 있을 때, 뜻이 현시한다. 뜻의 본질이 민중에게 개방되는 것이다. 뜻의 해석학적 의미는 없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다. 또한 뜻은 처음도 나중도 없다. 뜻은 늘 있었고 있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그 뜻을 묻기만 하면 된다. 묻는 순간 뜻이 솟아오르고 피어오르는 것이다. 뜻을 묻게 되면 민중에게 그 뜻은 곧 삶[生]이 되고 숨[命]이 되면서 돼감[歷史]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뜻이 삶과 생명, 그리고 역사가 된다는 것은 뜻이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미 주어져 있는 뜻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민중은 입과 눈과 귀가 모두 가려지고 막혀 있어서, 그 뜻, 형이상학적 문제에 천착하지 못하고 떠밀려 내려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민중 현존재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민중이야말로 순수한 얼을 가지고 역사의 운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한 얼조차도 욕망의 덩어리가 되도록 방치하다 못해 일깨우지 않는 것이다. 깨어나는 민중은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은 하나의 얼을 가지고 있다. 민중은 갈라지고 분열하는 얼이 아니다. 민중의 얼이 하나라고 하는 사실은 얼 자체가 이미 주어져 있음이고 얼을 통해서 유의 고착과 고집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워지는 무의 투신을 하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무의 투신, 얼의 화신에서 이성, 역사, 철학, 종교, 문명이 나온다. 얼은 모든 것의 근본으로서 모든 존재자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민중의 얼은 달아나거나 부유하지 않고 나와 너에게 현시한다.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탈[野; 본성, 본래성]과 글월[文]이다. 인간 현존재에게 바탈이 있기 때문에 글월이 생긴다. 바탈이 없다면 인간 현존재의 무늬가 형성될 수 없다. 지금 민중의 얼이 도처에 현시하면서 인간 현존재의 정신적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무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바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바탈이 희미하기 까닭에 무늬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 물론 무늬의 현상은 곧 바탈의 존재 유무를 확인시켜준다.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바탈과 무늬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바탈의 선험성으로 인해서 무늬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바탈, 곧 생각이 있어야 한다. 민중이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무늬는 그려낼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무늬를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함석헌은 말한다. “하늘의 천체를 통해 나오면 천문(天文), 땅의 것을 통해 나오면 지문(地文), 사람 자기의 일을 통해 나오면 인문(人文), 그러나 무엇을 알았든지 결국 안 것은 자기요, 드러낸 것은 제 속에 있는 얼이다.”(인간혁명의 철학, 141쪽)


얼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고지(告知)한다. 얼이 가리키고 침묵하기도 하는 것은 결국 인간 현존재의 바탈과 무늬인 것이다. 바탈을 잃어버리고서는 무늬를 그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바탈을 찾아야 한다. 아니 좀 더 근원적으로는 바탈을 물어야 한다. 민중 현존재가 뜻을 물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바탈을 물어야 한다. 바탈이 어디 있는가? 바탈은 존재하는 것인가? 바탈은 어떤 양태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인가? 혹 바탈이 은폐된 것은 아닌가? 아무런 무늬를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결이 곱거나 거칠거나, 아름답거나 투박하거나 하는 무늬-결을 아무런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민중 현존재의 바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으로 민중의 얼조차도 죽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민중의 얼이 바탈과 무늬로 현존해야 하는데, 눈을 크게 뜨고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섬뜩한(unheimlich) 것이다.


“본래부터 있는 것은 바탈이다. 천명이요 성(性)이다. 문(文)은 그것을 내 처지에 따라 내 힘대로 드러낸 것이다. realize한 것이다.” 이제 물음은 어떻게 바탈을 현실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와 문명의 실현이다. 성숙한 바탈이 내재된 문화와 문명을 통해서 지금 인간 현존재의 의식과 정신이 무엇인가를 증명해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현존재의 바탈, 즉 정신과 인간 본래성의 발현을 통하여 새로운 풍속, 법, 규칙, 제도 등이 정립되는 기회들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의 종합이 시민 사회(civitas)가 되는 것이고 문명이 되는 것이다. 인간 현존재의 바탈은 본래적으로 시민 사회, 혹은 민중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 내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중사회의 도래를 꿈꾼다면 새로운 바탈의 발현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현존재가 어떻게 뜻을 물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뜻을 발견하는 것이 민중 현존재의 사명이어야 하고 그것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민중 현존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중 현존재는 이제 이미 주어져 있는 뜻을 실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현존재의 보편적인 얼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양태들로서 바탈과 무늬를 실현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바탈의 외현이 무늬다. 지금 우리는 인간 현존재의 정신적 무늬의 결핍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인간 현존재의 바탈이 발현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바탈을 중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민중 현존재가 되어야만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죽임의 문화가 아니라 생명의 문화, 살림의 문화, 인간과 모든 존재자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문명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얼의 현현을 민감하게 간파하고 그것을 자신의 바탈로 일구어 낼 때 건전하고 건강한 무늬가 만들어질 것이다.


혁명은 체제를 바꾸고 뒤집어엎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혁명은 얼의 현실태이고 동시에 바탈의 혁명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서 외형적인, 체계적인 혁명을 했다고 해서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함석헌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바탈을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항상 물어보아라!”



글쓴이_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