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무교회주의의 종교 수사학

anarchopists 2019. 10. 25. 01:3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06/2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무교회주의의 종교 수사학



함석헌은 “무교회 신앙이란 직접으로 단순히 하느님만을 알자는 신앙”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물론 ‘하느님만’이라는 표현은 유일신이나 배타적인 신론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것은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강한 수사학적 발언이라고 봐야 한다. 즉 발언자 자신의 신념과 감정이 드러나 있으면서 가능한 한 특정한 청중을 보편적 청중으로 인식하여 진리 혹은 발언자의 종교 신념의 타당성(validity)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만’이라고 할 때 그것은 특정한 대상(집단/계층)에게만 해당하는 존재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 Habermas)에 의하면, 진리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성실성(sincerity), 진실성(truth), 정당성(rightness), 명료성(intelligibility)이 있어야 한다. 자기기만이나 무지를 극복하고, 도덕성이 담보되어야 하며, 타자가 이해될 수 있는 주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교회주의의 종교적인 수사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과연 여기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첫 번째로 ‘하느님만’을 알자는 신앙을 전달하려는 데에서 그 진리 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보편적 청중에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진리 타당성이 검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군더더기의 신앙, 무언가 잔뜩 붙어서 겉꾸린 신앙이 아닌 순수하게 초월자에게만 개방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무교회주의 신앙이다. 실존은 오직 하느님 앞에서 있는 단독자일 뿐이고, 그 단독자는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행위 하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꾸 잡다한 수식어를 통해서 초월자를 설명하고 기술하려는 것은 오만이지 신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은 그저 초월자를 알고(사유하고) 실천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사유도 하지 않은 채 초월자를 경험했다고 하는 발언을 통해서 초월자 그 자체를 고도의 종교적 교리 체계로 묶어 두려고 한다.


그것은 순수 신앙이 아니라 인위적 신앙, 이론적 신앙, 체계화된 신앙일 뿐이다. 함석헌은 그것을 거부하는 “반항아”라고 말한다. 무교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항적이고 저항적일 수밖에 없는 특징이 여기에 있다. 종교적 제도화, 체계화에 대해서 자유로운 종교이기를 원하는 것이 무교회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초월자에 대해서 까지도 그 인식과 행위가 오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초월자의 현존과 의지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와 삶이 좌지우지 된다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 것 또한 무교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본 노선이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월자를 향한 마음, 초월자만을 신앙의 기저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을 근본으로 하고 그 중심이 나에게만 있지 않고 보편타당한 중심, 주관적 보편성의 신앙적 잣대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대안 없이 반항만 하는 유아적 신앙 태도가 아니라 이유가 있는 반항, 즉 오직 초월자 자체만으로 만족이 되며 그 만족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이어야 한다는 보편타당성, 보편 청중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또한 “싸움의 종교”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가 진리를 위해서, 죄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죄로 물든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초월자에게로 “빼앗아 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함석헌은 “세계를 정복하는 권능”, “전투정신”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달리 해석하면,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가 “사랑의 싸움”(liebender Kampf)이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진리를 위해서 공동으로 투쟁을 해야 하며, 진리를 찾아내는 공동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예수는 진리를 위해서 사랑의 싸움을 한 인물이다. 그 역사적 예수를 닮자고 하는 것이 무교회주의의 신앙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 예수의 “사랑의 싸움”은 어떤 무리들과 시작했는가. “갈릴래아 호수를 서성거리는 그를 따라가 보았다면 우리는 그가 한 줌만한 어부와 더불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통하는 그를 좇아가 보았다면 우리는 그가 소경, 벙어리, 절름발이, 반신불수, 세리, 전과자, 창녀, 정신병자의 떠들고 밀치고 싸우고 하는 중에 둘러싸인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군대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누가 있다면 그는 죄인, 병인을 불러 구하는 그리스도밖에 될 것 없습니다.” 함석헌은 무교회주의가 민중의 종교를 표방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한국의 운명, 여러 종교들이 있지만-그는 유교, 불교, 동서양 문명 전반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결국 무교회주의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것은 야스퍼스의 역사철학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거기서 자기가 자신의 역사성을 각지하는 의식”으로서의 실존적 역사의식, 종교를 통한 현실인식을 자각했다고 볼 수 있다.


무교회주의의 종교 운명, 자기 운명의 수사학은 우리나라를 구원함과 동시에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역사적 자각 의식에 있다. 그 자각 의식은 일찌감치 역사적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의 종교적 역사의식의 발언과 실천은 한갓 입발림과 고도의 세련된 언어를 갖춘 그야말로 수사학적 언변으로 그치지 않는다. 영원과 시간, 영원과 실존적 현실 의식의 통일을 꾀하는 구체적 삶의 철학과 신앙을 강조한다. 무교회주의의 종교 수사학은 민중 종교로서 역사적 예수와 맞닿아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 예수와 동일한 전선(戰線)을 펼칠 수 있는 존재는 무교회 신앙을 가진 자들이며, 그들만이 낮고 천한 곳에 십자가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함석헌이 거듭 지적하고 있듯이, 그것은 교리전선(敎理戰線)으로 되지 않는다. 오로지 초월자에게만 자신을 의탁하고 냉철한 이성과 개별적 신앙을 앞세운 투철한 무교회 전사만이 가능할 수가 있다.


무교회 신자는 탈이념적・탈교리적 고아, 무계급적 그리스도인, 민중의 의식으로 무장되어 굴곡지고 어두운 삶의 세계로 내려가 역사적 예수를 따라가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교계의 고아로 자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는 이 현실을 도외시한 무작정 피안의 세계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초월자를 피안의 존재로 묶어두지 않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실존을 역사적 예수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할 뿐이다. 하느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초월자를 이 세계 안의 존재를 통해서 경험하고 만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하느님만을 이라는 수사학적 강변은 역사적 예수를 통한 행동 강령을 좀 더 신앙적으로 정교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느님, 즉 초월자는 모든 민중들의 마음과 삶 속에 투영된 순수한 내재자로서, 그들을 통해서만이 신앙인의 실존적 기반을 마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오로지 초월자는 민중의 실존적 근거이자 세계의 근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제도적, 체제적, 교리적 종교들은 자신들의 그 틀거지들을 고수하기 위해서 본질 아닌 것들로 포장을 하고 기득권층과 야합을 하게 마련이다. 비본질적인 신앙으로 마치 그것이 본래적인 것인 양 호도하면서 종교적 실존으로서의 진리를 퇴색시킨다. 순수한 진리가 기교적으로, 수사학적으로 채색되면 종교적 실존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종교적 실존이 자유로워야 초월자에 대한 경험이 가능하다. 무교회주의는 종교적 실존의 자유를 추구한다. 하느님만, 역사적 예수의 실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것만을 발언하는 것은 수사학적 유희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종교적 실존의 고양된 자유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만을 알자와 역사적 예수의 민중 신앙적 수사학은 어느 특수한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과학철학적 입장에서 말하는 ‘단칭 명언’이 아니라,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걸쳐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보편 명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결단코 일회성이나 단편적 신앙 형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관찰 가능한 경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사실을 통해서 초월자를 언급하는 것을 신의 과학화, 증명된 지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다머(H.-G. Gadamer)가 말했듯이, 경험 이전에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의 경험)과 역사적 예수를 통한 민중 신앙(의 경험)은 그 경험을 가리키는 무교회주의의 선험적 주장이라 할 것이다. 또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관심을 가지라는 아나키즘적 인식론을 말하는 것이다. 토마스 쿤(Thomas S. Kuhn)은 패러다임 이론(전과학→정상과학→위기→혁명→새로운 정상과학→새로운 위기...)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빌린다면, 무교회주의 혹은 무교회신앙을 미성숙한 전종교(前宗敎)가 아니라 성숙한 종교, 즉 정상종교(normal religion)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를 반증하고자 하는가? 그 종교 논리 또한 참신하지 않다면 반증 가능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_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