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무교회주의의 종교학적 이해: 민주주의적 신앙을 찾아서
anarchopists
2019. 10. 25. 01:3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06/25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진짜 관용은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관용하는 것이다”_S. Zizek
무교회주의의 특징은 현상적으로 일정한 교권(敎權)이나 의식(儀式)에 반대한다는 점에 있다. 슬로베니아 학파의 거장 슬라보예 지젝(S. Zizek)은 “인간은 피부색과 인종, 민족과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인간은 영성과 이성을 박탈당하면 인간성도 잃는다”는 말을 하였다. 교권과 의식 중심주의 종교는 위계적 질서에 따라서 지배와 종속 관계가 형성되는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는 그러한 위계적 체계에 따른 형식주의를 탈피하여 수평적 종교 구조 혹은 신앙 구조를 추구한다. 그러한 형태의 무교회주의는 인간이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 신 앞에 있는 인간은 모두가 동등하다라는 대원칙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교회주의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원칙, 즉 수평적 신앙 담론에서 나온다.
오늘날 성직자중심주의 종교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성적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성직자와 비성직자라는 이분 구조 속에서 성직자가 전례와 의식, 경전과 교리의 해석학적 권위를 독점함으로써 그에 따른 여러 폐단들, 즉 종교의 형식과 내용의 불완전성 및 불일치성, 계시와 판단, 혹은 식별의 유한성과 오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한 헤게모니가 작용하는 비본질적 종교 현상이 목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함석헌은 바로 그러한 비본래적인 종교 현상을 비판하면서 교권과 의식으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하여 개인의 신앙 체험과 개별 구원에 초점을 맞춘 무교회주의 종교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신앙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개성(individuality)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인간의 몸과 의식을 지배적 위치에 있는 타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신앙적 판단, 그리고 실천을 일정한 권위에 의존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애초에 종교가 인간의 성숙과 의식의 발전, 그리고 숭고한 도덕성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속박됨이 없이 자기의 의지적인 종교성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의식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존재는 개성이 없는 분열된 자아를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의탁하는 것이 병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무교회주의는 그야말로 어떤 유한적 존재에게라도 의존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가 구원의 주체적인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교회는 개성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요, 개성 안에 있을 것이요 개성을 통해서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권력적 통치와 교권에 의한 신앙적 계몽과 ‘지배적 계몽’은 이제 그 힘을 상실하였다. 신앙적 계몽은 각자 개성을 가진 인간 안에 초월자의 빛이 들어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교권이나 성직자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너를 통해서, 네가 나를 통해서 성숙한 종교적 인간이 되는 ‘상호주관적 계몽’(intersubjective enlightenment)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전 해석의 독점, 전례 집전의 주도권 등으로 인해서 종교 계몽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지배적인 전달의 형태로 일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그러한 계몽이 위아래가 없이 평등한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에 있어서 문제의 중점은 상호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말씀 대 인간성에 있다”는 함석헌의 말은 바로 그러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월자의 언어와 문자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차별이 없다는 평등성과 수평적 관계를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 개인은 조직적 관계와 체계 속에 갇혀 있을 수가 없다. 인격적 개인은 전체로서 개체 안에 있고, 개체는 전체 안에 있다. 여기서 전체는 다시 조직적 체계를 갖춘 유형적 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인격이 모인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개별적 인간이 우선이 되어 그 인격적 개인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무형적, 무체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무교회주의에서 개인의 주체성, 주관성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교회주의의 주관성은 ‘인간적’이라는 수식어와 통한다. 인간적이라고 할 때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을 본질로 삼는 종교가 아니면 진정한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흔히 종교를 빙자해서 초인간적인 것을 강제,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또한 성직자중심주의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요 체제 유지를 위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의 진면목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격적 인간을 완성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체제 유지와 체계적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서 인간을 반인간적, 병리적 존재로 이끄는 경우를 보게 된다.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당)주의, 불교(사찰)주의, 모스크주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의 공간을 채우며 종교적 사유를 지향하는 개별 인격이 더 중요하다. 건축물에서 종교적 메시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성스러운 공간을 성(聖)의 몸짓으로 행위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개별 신앙이 주는 메시지가 더 본래적이다. 종교의 텍스트가 근본 바탕을 이루고 상호인격적으로 혹은 의사소통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꾀하는 것은 개별 인격의 공동체라는 고유 텍스트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교회주의는 반항적, 부정적,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 공동체 안의 개별 인격으로부터 성스러운 메시지가 전달되고 전파되기 위해서는 건축물이라는 유형적 성격, 위계적 질서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교회주의가 교회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주의를 배척하는 것이다. 교회 본위, 건축물의 인위성을 통하여 결국 인간중심주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인의 인격적 성숙의 가능성과 개인의 구원을 논한다고는 하나, 그것이 인간중심주의로 흐르는 것은 위험하다. 유형적 교회가 마치 만능이라고 착각하고 그 안에서 고착화된 신앙 내용을 형성하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교회 신앙은 영원히 체계를 이루지 말자는 것이다.” 고정되고 고착화된 것일수록 썩게 마련이다. 운동과 역동성의 성격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되었다 싶으면 곧 그 틀을 깨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려는 무교회주의는 영원히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종내에는 신 안에 머물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이 없다. 체제와 위계, 그리고 체제 속에 머물면 머물수록 초월자를 절대(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본질이 퇴색되면서 체제적 종교로 고정이 되며 사람 또한 변화를 싫어하여 안주하려는 안일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신앙의 데모크라시”라고 설파한다. “영혼의 요구로 볼 때 예수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자녀요 다 같이 제사요 1수(1首)의 가치고 99수의 가치에서 경(輕)치 않다는 성서의 데모크라시는 천래의 복음이다. 고로 저는 자기 신앙에 오는 일체의 간섭구속을 배척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데모크라시가 아니요 사랑의 데모크라시다.” 무교회주의의 신앙 민주주의는 절대 평등, 절대 자유를 추구한다. 인위적이고 가변적인 원칙과 법, 규칙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곧 무교회주의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그 신을 향하여 온전한 사랑을 드리는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하느님만을 사랑하자는 노력이다. 그를 위하여 교회를 버린다.” 이는 영원한 하느님의 교회를 취하기 위해서 제도적, 체제적, 위계적 교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무교회주의는 신앙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한병철이 말한 것처럼, “진리조차도 권력과 결탁”하는 것을 거부하고, ‘진리가 권력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에 저항하는 한 종교적 흐름으로 간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교회주의의 논조를 찬성하고 반대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종교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는 건강하고 성숙한 종교운동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글쓴이_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무교회주의의 종교학적 이해: 민주주의적 신앙을 찾아서
“진짜 관용은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관용하는 것이다”_S. Zizek
무교회주의의 특징은 현상적으로 일정한 교권(敎權)이나 의식(儀式)에 반대한다는 점에 있다. 슬로베니아 학파의 거장 슬라보예 지젝(S. Zizek)은 “인간은 피부색과 인종, 민족과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인간은 영성과 이성을 박탈당하면 인간성도 잃는다”는 말을 하였다. 교권과 의식 중심주의 종교는 위계적 질서에 따라서 지배와 종속 관계가 형성되는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는 그러한 위계적 체계에 따른 형식주의를 탈피하여 수평적 종교 구조 혹은 신앙 구조를 추구한다. 그러한 형태의 무교회주의는 인간이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 신 앞에 있는 인간은 모두가 동등하다라는 대원칙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교회주의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원칙, 즉 수평적 신앙 담론에서 나온다.
오늘날 성직자중심주의 종교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성적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성직자와 비성직자라는 이분 구조 속에서 성직자가 전례와 의식, 경전과 교리의 해석학적 권위를 독점함으로써 그에 따른 여러 폐단들, 즉 종교의 형식과 내용의 불완전성 및 불일치성, 계시와 판단, 혹은 식별의 유한성과 오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한 헤게모니가 작용하는 비본질적 종교 현상이 목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함석헌은 바로 그러한 비본래적인 종교 현상을 비판하면서 교권과 의식으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하여 개인의 신앙 체험과 개별 구원에 초점을 맞춘 무교회주의 종교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신앙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개성(individuality)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인간의 몸과 의식을 지배적 위치에 있는 타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신앙적 판단, 그리고 실천을 일정한 권위에 의존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애초에 종교가 인간의 성숙과 의식의 발전, 그리고 숭고한 도덕성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속박됨이 없이 자기의 의지적인 종교성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의식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존재는 개성이 없는 분열된 자아를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의탁하는 것이 병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무교회주의는 그야말로 어떤 유한적 존재에게라도 의존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가 구원의 주체적인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교회는 개성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요, 개성 안에 있을 것이요 개성을 통해서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권력적 통치와 교권에 의한 신앙적 계몽과 ‘지배적 계몽’은 이제 그 힘을 상실하였다. 신앙적 계몽은 각자 개성을 가진 인간 안에 초월자의 빛이 들어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교권이나 성직자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너를 통해서, 네가 나를 통해서 성숙한 종교적 인간이 되는 ‘상호주관적 계몽’(intersubjective enlightenment)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전 해석의 독점, 전례 집전의 주도권 등으로 인해서 종교 계몽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지배적인 전달의 형태로 일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그러한 계몽이 위아래가 없이 평등한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에 있어서 문제의 중점은 상호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말씀 대 인간성에 있다”는 함석헌의 말은 바로 그러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월자의 언어와 문자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차별이 없다는 평등성과 수평적 관계를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 개인은 조직적 관계와 체계 속에 갇혀 있을 수가 없다. 인격적 개인은 전체로서 개체 안에 있고, 개체는 전체 안에 있다. 여기서 전체는 다시 조직적 체계를 갖춘 유형적 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인격이 모인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개별적 인간이 우선이 되어 그 인격적 개인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무형적, 무체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무교회주의에서 개인의 주체성, 주관성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교회주의의 주관성은 ‘인간적’이라는 수식어와 통한다. 인간적이라고 할 때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을 본질로 삼는 종교가 아니면 진정한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흔히 종교를 빙자해서 초인간적인 것을 강제,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또한 성직자중심주의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요 체제 유지를 위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의 진면목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격적 인간을 완성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체제 유지와 체계적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서 인간을 반인간적, 병리적 존재로 이끄는 경우를 보게 된다.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당)주의, 불교(사찰)주의, 모스크주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의 공간을 채우며 종교적 사유를 지향하는 개별 인격이 더 중요하다. 건축물에서 종교적 메시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성스러운 공간을 성(聖)의 몸짓으로 행위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개별 신앙이 주는 메시지가 더 본래적이다. 종교의 텍스트가 근본 바탕을 이루고 상호인격적으로 혹은 의사소통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꾀하는 것은 개별 인격의 공동체라는 고유 텍스트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교회주의는 반항적, 부정적,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 공동체 안의 개별 인격으로부터 성스러운 메시지가 전달되고 전파되기 위해서는 건축물이라는 유형적 성격, 위계적 질서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교회주의가 교회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주의를 배척하는 것이다. 교회 본위, 건축물의 인위성을 통하여 결국 인간중심주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인의 인격적 성숙의 가능성과 개인의 구원을 논한다고는 하나, 그것이 인간중심주의로 흐르는 것은 위험하다. 유형적 교회가 마치 만능이라고 착각하고 그 안에서 고착화된 신앙 내용을 형성하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교회 신앙은 영원히 체계를 이루지 말자는 것이다.” 고정되고 고착화된 것일수록 썩게 마련이다. 운동과 역동성의 성격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되었다 싶으면 곧 그 틀을 깨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려는 무교회주의는 영원히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종내에는 신 안에 머물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이 없다. 체제와 위계, 그리고 체제 속에 머물면 머물수록 초월자를 절대(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본질이 퇴색되면서 체제적 종교로 고정이 되며 사람 또한 변화를 싫어하여 안주하려는 안일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신앙의 데모크라시”라고 설파한다. “영혼의 요구로 볼 때 예수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자녀요 다 같이 제사요 1수(1首)의 가치고 99수의 가치에서 경(輕)치 않다는 성서의 데모크라시는 천래의 복음이다. 고로 저는 자기 신앙에 오는 일체의 간섭구속을 배척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데모크라시가 아니요 사랑의 데모크라시다.” 무교회주의의 신앙 민주주의는 절대 평등, 절대 자유를 추구한다. 인위적이고 가변적인 원칙과 법, 규칙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곧 무교회주의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그 신을 향하여 온전한 사랑을 드리는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하느님만을 사랑하자는 노력이다. 그를 위하여 교회를 버린다.” 이는 영원한 하느님의 교회를 취하기 위해서 제도적, 체제적, 위계적 교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무교회주의는 신앙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한병철이 말한 것처럼, “진리조차도 권력과 결탁”하는 것을 거부하고, ‘진리가 권력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에 저항하는 한 종교적 흐름으로 간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교회주의의 논조를 찬성하고 반대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종교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는 건강하고 성숙한 종교운동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글쓴이_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