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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섬김의 아득한 거리, 현존의 부재(히브 5,1-10)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10/21 22:38 ]에 발행한 글입니다.

섬김의 아득한 거리, 현존의 부재(히브 5,1-10)


섬긴다는 것의 의미, 섬김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에서 매우 많이 듣는 신앙행위 중에 하나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공경한다는 의미도 있고,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우에서도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고, 신에게도 적용되는 신앙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이 선행되지 않고 단지 신분상의 의무나 당위에 의해서 섬김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사랑이 없이 사람을 섬기고 신을 받들어 모신다면, 이는 단지 형식적이고 빈 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르투어 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세상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사랑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분을 높여 드리는 것은 말로도 충분하지 않거니와 그분을 사랑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은 더더욱 아득한 거리가 있습니다. 자신을 낮춰야 하느님이 높아지고 인간의 사랑이 그 높이에 다다를 수 있게 됩니다. 횔덜린은 이러한 말로서 인간의 정신을 섬깁니다. “어른거리는 눈길로 나는 벌써 진지한 한낮의 역사(役事)로부터 미소 짓는 그 사람, 축제의 영주를 보는 듯하다”(<평화의 축제>). 의례 혹은 예배를 관장하는 사람은 성스러운 노동자입니다. 성스러운 노동자는 사랑으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가 대표성을 띠는 것은 섬김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거리를 아득하지 않도록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스러운 노동은 인간에게 신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써만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는 존재입니다. 물론 신은 항상 현존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늘 나타나 있습니다. 이미 나타나 있는 그 존재를 더욱 잘 나타내 보여 주려는 사람이 성스러운 노동자, 즉 대사제(대제사장)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를 사랑으로 좁혀주는 존재를 대사제라고 할 때, 그 대표적인 표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앙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타나심, 하느님의 나타나 있음을 오롯이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또 다른 연약한 사람들이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만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사랑이 가 닿을 수 있도록 해주신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섬김은 사랑이고 미소지음입니다. 성스러운 노동, 성스러운 일, 즉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그 행위로 인한 미소지음입니다. 그렇게 섬김 안에서 하느님의 미소지음과 인간의 미소지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현존, 곧 하느님의 자기 나타나심의 증거입니다. 진지하고 진중한 신앙행위나 성스러운 노동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소지음이 그에 비해 낮은 신앙적 반응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사제가 자신의 연약함과 신자들, 인간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제물을 바친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의 미소지음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 직무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는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관계로 인한 미소지음의 신앙 감성의 깨달음에 가 닿았기 때문입니다. 부름에 응답하는 대제사장(대사제)은 자신의 호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호명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호명으로 하느님께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느님과의 직접대면 자격을 얻은 사람입니다. 직접 대면을 통해서 연약한 인간에게 알려주는 것은 각 개인의 마음과 영혼에 가 닿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신분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 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주셨을 뿐입니다. 섬김은 그렇게 내가 주기도 전에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인간 섬김, 그리스도의 인간 섬김이 위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서 나타내고 또한 나타나도록 하기때문입니다. 앞에서 섬김은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섬김의 행위 자체가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이 섬김의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없이 섬기는 노동행위는 듬성듬성 이가 빠진 듯이 인간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성기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횔덜린은 또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 그대의 낯선 곳을 기꺼이 거부하고 길고 긴 행군으로 지친 눈길 떨구고, 잊으며, 가볍게 그늘 덮이여, 친구의 모습을 띨 때, 그대 두루 알려진 자여, 그 드높음이 무릎을 꿇게 한다. 그대 앞에서 내 오직 한 가지, 그대 유한한 자 아니라는 것 외에 아는 바 없다. 현명한 자 나에게 많은 것을 해명할지라도 이제 하나의 신 또한 모습을 나타내니 다른 광채 있으리라.” 낯섦의 거리, 그 낯선 맘이 하느님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할 때, 그 아득한 거리를 좁히는 것도 섬김입니다. 섬김의 거리는 아득합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아득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이름 사이도 아득합니다. 하지만 섬김이 있는 곳에는 그 아득한 거리가 사라집니다. '제발 하느님과 인간의 아득한 거리가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구했던 그리스도가 섬김의 사제, 섬김의 대제사가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아득하고 낯선 하느님과의 거리를 거부하고, 섬김의 도리로 인간과 하느님의 아득한 거리를 좁혀서 우정 어린 관계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드높은 하늘, 드높은 하느님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신앙행위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라고 한 것은 그 드높음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기를 바라서입니다.

섬김의 최고의 극치는 고통과 고난의 무릎을 자발적으로 꿇는 데 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의 아득한 거리를 좁히고 두 존재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고난과 복종, 고통과 죽음을 감내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고통과 고난, 굴종과 죽음이 더 이상 인간의 문제가 아닌 듯이 섬김의 행위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행위로 서로 짐을 나누어지게 되니 모든 인간의 한계상황이 더는 한계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섬김의 위력은 도저히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도 타개해 나가는 인간의 실존이 닿게 되니, 한계상황이라는 말은 의미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공경하고 받들고 모신다는 것의 사전적인 정의가 가볍지 않다는 말입니다. 횔덜린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가 아니라, 그는 먼저 예고되어 있었다. 또한 홍수도 불길도 겁내지 않았던 한 사람 놀라움을 자아내니, 예전 같지 않게 고요해지고 신들과 인간들 사이 어디에서도 지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섬김이라는 이름은 공허하거나 껍데기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가 섬김이라는 말을 난발하는 대신에 비어-있는[공-허] 이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섬김은 예수의 고난과 복종을 통해서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섬김의 모범과 내용, 그리고 결과가 그의 삶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제 인간들이 섬김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섬김의 행위도 그 심연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섬김은 성기고 형식적입니다. 섬김의 상실이고 사라짐입니다. 섬김의 좌표가 사라지고 섬김이 예수의 행위 수준에서 이루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섬김은 무화되고 맙니다. 섬김이라는 이름이 사회적인 용어가 아닌 신앙적인 특별한 언어로 자비를 잡으려면 하느님을 향한 복종을 연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고개 숙이지 않은 사람이 인간에게 고개를 숙일 리 만무합니다. 물론 전략적 관계에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종적 행위가 나타난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이 의미가 가득 찬 말이 되려면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복종, 인간의 비굴한 맘짓과 몸짓이 아닌 자발적이고 평등한 복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에 의한 상호간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섬김은 신앙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가녘이나 껍데기로 퇴락하고 아첨에 물든 무감각으로 인해 예수의 신앙감정도 실리지 않은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호간의 구원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은 형식적인 예의나 차리는 행위가 아닌 예수와 같은 고난과 복종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우리의 신앙적 몸짓이 그리스도에게,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표지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인간의 구원이 찾아오게 됩니다. 섬김이라는 말에 우리가 닿지 못한 아득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섬김이 타자를 향한 나의 섬김이 아니라 나를 향한 타자의 섬김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마음을 살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 예수의 겸손한 복종(humble submission, The New English Bible)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물론 우리가 서로 섬기는 삶을 살도록 서로 아래에 있기를 요청하는 목소리, 그래서 그 보냄(sub+mittere)을 완성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ob+ey; 듣다, obedience: 복종) 할 시간입니다. 섬김이 신의 현존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긴 곳이 없이 곳곳에 '신이-나타나-있다는 것'을 사람들로부터 승인받을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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