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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부쿠데타가 이 나라 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31년 후퇴시켰다.

by anarchopists 2021. 5. 16.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반역세력들이 5.16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군대의 힘으로 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쿠데타라고 한다. 쿠데타세력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장면정권의 용공, 무능력, 부패정권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궐기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5.16군사반란의 내면적 배경이 된 것은 민주당 내 신파인 이철승이었다. 1961년 봄부터는 사회가 질서를 찾아가고 정치권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위도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민심이 돌아오고 희망적이었다. 국민경제도 안정이 되었다. 6월에 장면의 미국방문, 한미정상회담도 계획되어 있었다(케네디로부터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얻어내려는 기회) 만사가 잘 풀려나갔다. 이대로 가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5.16쿠데타권력이 내세운 쿠데타 명분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그들 스스로 간행한 《한국군사혁명재판사》(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에서 이들의 쿠데타 모의가 1960. 9 10일에 이미 이루어였음을 밝히고 있다. 충무로 충무장에서 김종필, 김현욱, 오치성, 길재호 등이 군사정권 수립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있었다. 모든 시민이 새로운 정부(민주당의)에 응원을 보내고 있을 때, 반란세력들은 정부전복을 모의하고 있었다. 반란세력들이 민주당 정부를 부패 정권이라고 한 것은 순전히 날조다. 5.16쿠데타는 소수 정치군인들의 권력욕에서 발생하였다.

5.16쿠데타는 한국에 대한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이 급히 정면총리를 찾았으나 총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카멜수녀원에 신변을 의탁. 만약 총리가 미국대사관으로 피신을 했더라면 3,600명의 쿠데타군을 진압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명하지 못한 장면이 쿠데타세력의 군사정변을 성공시키는 빌미를 주었다. 또 당시 미래를 보지 못하는 윤대통령은 미국 대사의 쿠데타군 진압 승인요청을 내정간섭으로 일축해 버렸다. 윤보선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쿠데타를 인정했다.” 윤보선은 국군통수권자로서 정통성 있는 합법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1961, 6.10, 김종필의 계획아래, 중앙정보부가 설치되고 여기서 모든 정치공작과 사찰 음모가 배양되었다.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정치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종하였다. 박정희 정권 18년동안 정권수호의 첨병이 되었다. 여기서 조직적 부정부패, 인권과 민주주의 말살의 총본산이었다. 역대 부정선거도 지휘하였다. 군사정권을 지키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아지는 군인대통령 배출의 상실이 되었다. 따라서 5.16쿠데타는 무력을 동원한 권력찬탈이었다. 민주주의의 싹을 무력으로 잘라버렸다. 5.16 쿠데타권력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사형시켰다. 5.16쿠데타의 내막을 폭로했다는 이유다.

5.16쿠데타권력의 부패가 시작되었다. 〈부정축재처벌법〉의 재정이 곧 부정축재를 불러일으켰다. 앞애서는 부정축재다 처벌이었지만, 뒤로 재벌들에게 정치자금을 수수하는 게 부정축재처벌법이었다. 결국 ‘4대의혹사건’, ‘삼분三粉폭리사건’이 터졌다. 부패를 일소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회복하고 다시 본연의 군인으로 돌가겠다던 박정희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공화당(지금의 국민의힘당 전신) 창당을 서둘렀다. 그래서 공화당 창당자금에 필요한 자금확보에 들어갔다. 창당자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터진 사건이 4대 의혹사건이다.(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회전당구장/파친코사건) 그리고 삼분폭리사건은 시멘트, 밀가루, 설탕 세 가지 가루사건이다. 곧 기업의 폭리를 묵인해 주는 대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탈취한 사건이다. 4대 의혹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였다. 쿠데타세력의 치부를 드러낸 사건이다. 이 모든 책임을 지고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중정에서 물러나 외유의 길을 떠났다. (이상, 김대중 자서전에서 옮겨옴, 20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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